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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가 시크릿

정몽준 일대기, 정주영이 가장 사랑한 아들, 생모는 누구?

by 별빛아침 2024.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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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회장이 8남 1녀 중 가장 애정을 가졌던 아들은 여섯째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이었습니다. 정몽준 또한 극진한 효자로 아버지 정주영과 어머니 변중석에게 가장 살가운 아들이었습니다. 정몽준의 어린 시절, 축구협회 회장 시절, 정치인 시절, 그리고 생모에 대해 고백한 내용을 모두 알아보겠습니다.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

[목차]

1. 정주영의 금쪽같은 여섯 째 아들

정주영 회장의 여섯 째 아들 정몽준은 형제 중, 가장 어린 서른둘에 현대중공업 사장이 되었습니다. 사실은 장남이 아닌 정몽준에게 현대 그룹을 물려주고 싶어 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정몽준에 대한 신뢰와 사랑은 남달랐습니다.

정주영 회장이 평소 ‘우리 집안에도 공부 잘하는 아이가 있다’면서 자랑했던 아들이 바로 정몽준인데, 그는 서울대학교 경제학 학사, MIT 슬론 스쿨 MBA, 존스홉킨스 국제정치학 박사를 마쳤습니다.

특히 남자답고 배짱 두둑한 성격도 아버지를 빼닮았는데, 정몽준이 어렸을 때 용돈을 주면 1주일도 안 돼서 다 써버리고 아버지 비서에게 몰래 용돈을 더 타가는 만행을 저지르는 일이 잦았는데, 천하의 구두쇠이자 엄격한 아버지였던 정주영 회장이 껄껄 웃으며 넘겼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정몽준은 정주영 회장이 말년에 긴 투병 생활을 했을 때 가장 자주 찾아온 아들이기도 합니다. 그만크 효자로 유명한데요. 정주영 회장 장례식에서도 가장 크게 오열했을 만큼, 부모에게 ‘정’이 많은 아들이었고, 특히 어머니 변중석 여사에게 각별했습니다. 평생 바쁜 아버지 대신 많은 친인척 뒷바라지까지 하며 고생하는 어머니를 걱정해, 결혼 후에도 틈틈이 어머니를 찾아가서 말벗을 해주고, 어머니 신경통을 걱정해 몇 시간씩 다리를 주물러주는 딸 같은 아들이었습니다.

정몽준 중학교 졸업식, 어머니 변중석과

변중석 여사도 정몽준을 너무나 아껴서 40대 중반에 미국 유학을 떠나는데도 공항에 마중 나와서 눈물을 쏟았습니다.

  • 어머니가 신경통으로 잠을 주무시지 못하는 날이 늘어갔다. 나는 어머니를 찾아가 자주 다리를 주물러드렸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지난 일들을 즐겨 말씀하시고 했다. “시집을 갔는데 내가 너무 어렸어. 열여섯 살이니 뭘 알겠냐? 첫날밤, 너희 아버지가 그리도 크고 무섭더라” 이런 말씀을 하실 때 어머니의 눈은 열여섯 소녀처럼 빛났다. 열여섯 살에 시집온 어머니는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오신 후 친정 식구들을 만나보지 못했다. 통천에서 함경북도 청진으로 외가 식구들은 이사했고, 그 후 분단이 되어 어머니는 친정 소식을 영영 듣지 못했다. (정몽준 자서전 중에서)
  • 당시에는 최고 교육을 받은 숙모들이 들어오면서 학교교육을 받지 못한 어머니가 느꼈을 외로움이나 상실감을 난 알지 못했다. 별다른 취미도 없이 평생 식구와 친척들 뒷바라지만 하신 어머니는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어머니의 병은 외로움에서 온 게 아니었을까. 결국 어머니는 별세가 악화돼 아산병원에 입원을 하셨다. 그 후 어머니는 병명도 모르는 통증에 시달리셨다. 편찮으신 어머니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불효자식의 절규였던 것 같다. (정몽준 자서전 중에서)

※변중석 여사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아래 포스팅을 꼭 확인해주세요!

 

변중석 일대기 - 현대 정주영 부인, 정몽준 어머니

변중석 여사는 현대그룹 창업주인 정주영의 배우자입니다. 쌀 배달원이었던 정주영에게 시집와 남편이 불굴의 개척 정신으로 현대 그룹을 굴지의 기업에 올려놓기까지 묵묵히 조용한 내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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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정몽준의 생모는 따로 있었나?

정몽준의 생모가 변중석이 아닐 것이란 오래된 소문이 있었습니다. 국악인 안 모씨를 지목하는 구체적인 소문도 돌았지만, 언제나 '내 어머니는 변중석여사 뿐이다.'라고 일축했는데요. 하지만 2002년 대선 출마 당시 생모 문제가 크게 불거지자, 정몽준은 울며 겨자먹기로 생모에 대한 고백을 했습니다. 딱 한 번 자신의 생모를 대면한 적이 있지만, 자신이 어머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여전히 변중석여사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정몽준) "1978년 미국 콜럼비아 대학 봄학기를 마칠 즈음 서울에서 편지가 한 통 왔다. 내 어머니라고 주장하는 내용의 편지였다. 그 해 여름 서울에 갈 기회가 있어서 강남의 한 아파트를 찾아갔다. 아주머니가 한 분 계셨는데 내 어머니라고 했다. 20분 정도 얘기를 듣고 나왔다. 집에 와서 아버님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너와는 상관 없는 일이고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하셨다. 그 이후 다시 찾아가 만난 적은 없다."

2. 정몽준이 아니었다면 2002 월드컵 4강 신화도 없었다?

정몽준은 2002년 한일월드컴 4강 신화 달성에 크게 일조한 인물입니다. 그는 1993년 대한축구협회장직을 맡은 뒤, 약 15년 동안 세 번에 걸쳐 연임했습니다. 전임자였던 최순영 신동아그룹 회장,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에 이어 재벌 출신이라는 후광으로 회장직을 맡게 됐지만, 2002 한일 월드컵을 유치하면서 커다란 성과를 남겼습니다.

당시 정몽준이 월드컵 유치에 나서겠다고 하자 실현 가능성이 없다는 비판 여론이 대다수였습니다. 하지만 정몽준은 투표권을 가진 전 세계 집행위원을 일 대 일로 만나 설득했고,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라는 반전의 성과를 이뤄냈습니다.

정몽준은 차범근, 이회택, 히딩크 등 축구의 전설 6명과 함께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되면서 축구계의 신화로 남아 있습니다. 2009년 정몽준이 물러나고 2013년 사촌 동생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이 바통을 받으면서 현대가 체제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3. 70원 때문에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

정치는 정주영 회장이 못다 이룬 꿈이기도 합니다. 정주영 회장은 1992년 제14대 대통령선거에 도전했지만 낙선했습니다. 정몽준 회장은 울산 동구 지역구에서 내리 5선, 서울 동작구 을에서도 배지를 두 번이나 더 달아 무려 7선 국회의원의 신화를 썼습니다. 2002년 한일월드컵 유치의 영광과 지지에 힘입어 대통령에도 도전했지만 끝내 아버지 한을 풀어주지 못했습니다.

3-1. 흑역사로 남은 ‘버스 요금’ 70원 발언

정몽준은 2008년 전당대회 당시, 라디오 생방송 토론에 출연해 상대 후보로부터 요즘 버스비가 얼마인지 아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정몽준은 굉장히 어려운 질문이라며, "한 70원 하나요?" 라는 멘트를 남겼고, 두고두고 회자되는 흑역사로 남았습니다. 당시 버스비는 성인 기준 1000원이었습니다.

아들 발언 사과하며 기자회견 중

3-2 ‘정몽즙’이라 불리게 된 사연

정몽준 회장의 정치생활은 ‘정몽즙’이라는 흑역사로 마무리되었습니다. 2014년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한 정몽준은 유력한 후보였는데, 선거기간 중 막내아들이 SNS에 세월호 유족들이 고위 공직자에게 물을 뿌린 행위를 두고 ‘시민의식이 미개하다’라고 말해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즉각 사과 기자회견을 연 정몽준은 눈물을 보였는데, 이 때 눈물을 억지로 짜내는 듯한 모습을 보여 ’ 정몽즙‘이란 별명만 얻었을 뿐 서울 시장 선거에서 낙선, 이후 더는 정치적으로 재기하지 못했습니다.

 

정몽필 정주영회장이 교통사고로 잃은 장남, 정몽구 형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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