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재벌가 시크릿

정몽구 현대 왕자의 난을 이겨내고 재계 2위 그룹을 키워낸 뚝심

by 별빛아침 2024. 6. 14.
반응형

정몽구는 8남 1녀 중 둘째였지만, 형 정몽필이 세상을 떠나면서 현대가 장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신임을 받지 못한 탓에 현대자동차 부품과장으로 시작해 현대자동차 회장이 되기까지 인고의 시절을 거쳐야 했습니다. 

뚝심의 장자, 정몽구 명예회장의 파란만장한 인생사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정몽구 명예회장

[목차]

공부보다 운동이 좋았던 학창 시절

정몽구는 1938년생으로 정주영의 8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경복고등학교 재학 시절에는 강한 체구가 눈에 띄어 럭비 선수로 발탁되었고, 럭비부 주장까지 했습니다. 당시 정몽구가 이끈 경복고가 고교 럭비 시합에서 압승을 거둘 만큼 실력도 좋았습니다.

정주영일가 가족사진 (둘째줄 왼쪽에서 두번째 정몽구)

공부는 뒷전이었던 정몽구는 유급을 당해서 고등학교를 1년 더 다녀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아버지 눈밖에 나기 시작합니다.

어머니의 부탁으로 현대 입사

맏형 정몽필이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정몽구는 현대가의 장자가 되었지만, 아버지에게 신임을 얻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왕회장은 ‘영어도 못하고 머리보다 몸이 앞서는 몽구는 잡화상이나 시켜야지’ 라며 대학 졸업 뒤에도 입사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들이 딱했던 변중석 여사가 회사 직원들에게 따로 부탁을 해서 1969년 <현대 자동차 서울사업소 부품과장>으로 현대에 첫발을 내딛게 됩니다. 당시 현대의 첫 승용차, ‘코티나’를 생산했을 때였는데, 코티나는 일명 ‘코피나’라고 불릴 정도로 잦은 고장에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습니다. 부품과장 정몽구는 고객들이 쏟아지는 불평불만을 해결하기 위해서, 직접 트럭을 몰고 전국을 순회하기도 할 정도로 발이 땀이 나게 뛰어다니며 인고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밑바닥부터 시작한 ‘현대정공’

주로 현장에서 발로 뛴 정몽구

1977년 정몽구가 첫 경영을 맡은 ‘현대정공’은 정주영회장에게 물려받은 회사가 아닙니다. 밑바닥부터 시작하겠다는 결심으로 정몽구는 청계천 세운상가의 한 층에 사무실을 차리고 컨테이너 회사를 차렸습니다.

특유의 뚝심으로 공장도 완공되기 전에 해외 바이어들을 설득해하고 컨테이너를 수주받는 저돌적인 추진력을 발휘했고, 마침내 세계 컨테이너 시장의 40% 점유라는 전대미문의 성공을 달성했습니다. 현대정공은 오늘날 현대모비스의 전신이자 현대자동차그룹의 뿌리이기도 합니다. 

드디어 정주영이 재계 원로들에게 “우리 몽구 사업수완도 믿을만해!” 라고 자랑할 만큼 아버지에게 생애 첫 인정을 받게 됩니다. 

정몽구, 정몽준, 정주영 출근길 풍경

정몽구vs정몽헌 왕자의 난

손수 쌓은 실적으로 아버지에게 경영 능력을 인정받은 정몽구는 현대자동차를 걸쳐 마침내 1998년 현대-기아자동차의 회장직에 취임하면서 현대그룹의 회장직은 물론 자동차 사업을 총괄하게 됩니다. 이렇게 뚝심의 장자 정몽구가 후계자 자리를 굳혔나 싶었는데, 다섯째 동생 정몽헌이 무섭게 치고 올라왔습니다.

정몽헌은 유학 이후 현대전자에서 탄탄대로 입지를 넓혀 1998년 1월, 현대그룹 공동회장 직함을 부여받았습니다. 정몽구가 공동회장 자리에 오르기까지 30년이 걸린 반면, 아버지의 신임이 남달랐던 정몽헌은 단숨에 형을 추격했고, 이때부터 정몽구와 정몽헌의 정면 승부가 시작되었습니다.

정몽구, 정주영, 정몽헌 회의 석상

2000년 현대그룹뿐 아니라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왕자의 난’은 정몽구 회장가 정몽헌의 최측근 심복이었던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을 회장직에서 해임하고 고려산업개발 회장으로 전보시키는 인사 조치를 시도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에 크게 반발한 정몽헌은 아버지 정주영에게 일격의 조치를 부탁했습니다. 당시 정주영은 노환으로 인해 회사업무를 거의 보지 못하고 거의 병원에 칩거했던 상태였습니다.

충격의 3부자 퇴진, 반발한 정몽구

몽구냐, 몽헌이냐 고심하던 정주영은 초강수를 두게 됩니다. <정주영, 정몽구, 정몽헌 3 부자 모두 현대에서 손 떼고 퇴진하겠다>라고 발표한 것입니다. 정몽헌은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사직서를 내놓았지만, 정몽구는 “몽헌이가 적당한 시점에 자동차까지 차지하기 위해, 나를 밀어내려는 음모다”라면서 강력하게 반발했습니다.

어렵게 인정까지 받아 여기까지 올라온 정몽구 입장에서는 하루아침에 회장직을 내놓게 됐으니 참 억울하고 섭섭했습니다. 훗날 정몽구는 이때가 육십 평생 가장 힘든 시절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현대자동차그룹을 맡게 된 정몽구

결국, 정몽구는 현대그룹으로부터 현대차, 기아차, 현대정공 등 자동차 관련 10개 계열사를 떼어내 분가하게 되었습니다. 현대의 적통이었던 현대건설과 현대전자를 정몽헌이 가져가면서, 이때만 해도 왕자의 난의 승자는 정몽헌으로 여겨졌습니다. 

가족들의 연이은 죽음, 장자의 어깨

왕자의 난이 일어난 다음 해, 2001년 3월 현대의 왕회장, 아버지 정주영이 타계했습니다. 2년 뒤 2003년 8월에는 정몽헌이 현대 사옥 화단에서 시신으로 발견되는 충격적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날 사건 현장에 가장 먼저 달려온 사람은 정몽구였습니다. 그는 직접 시신 수습 과정을 챙기면서 현장을 진두지휘하고, 동생이 잠든 빈소를 한시도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켰습니다.

정몽헌 사건 현장, 정몽구 모습

현대의 장자 정몽구는 집안의 경조사에서 맏형의 책임감을 다하며 남다른 가족 사랑을 보여주기로 유명합니다. 일찍 세상을 떠난 형 정몽필, 몽우의 아들딸 결혼에서 혼주 역할을 하고 조카 딸 손을 잡고 식장에 입장하며 아버지의 빈자리를 빈틈없이 채워줬습니다.

특히 정몽우의 세 아들 정일선, 정대선 등에게는 각별한 삼촌이기도 합니다. 조카들의 유학 경비를 마련해 공부시키고 현대 자동차로 불러들여 자신처럼 밑바닥부터 경험하게 하면서 자신의 아들과 똑같은 경영 수업을 받게 했습니다. 

현대 장자의 투병설, 사망설

정몽헌의 죽음 이후, 그가 키우던 현대 건설을 거두어들인 정몽구는 현대차, 자동차, 철강, 건설 세 축을 중심으로 현대자동차그룹을 재계 2위까지 끌어올리는 데 큰 공헌을 했습니다.

정몽구 명예회장
정몽구 장남,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현 회장

2020년 정몽구는 아들 정의선에게 그룹 회장직을 물려주고 은퇴해 명예회장으로 남아 있습니다. 85세를 넘어선 고령에 일절 대외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 보니 끊임없이 투병설, 사망설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현대가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아래 글을 읽어 보세요!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회장, 정주영의 금쪽같은 장손 정몽구 장남

정의선은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 회장의 장손자이자, 아버지 정몽구 회장의 뒤를 잇는 현대자동차그룹 3세대 회장입니다. 그는 국내 재벌 3세대 CEO 중 가장 착실한 경영 수업을 받았으며, 가장

okgoodwriter.com

 

 

 

정몽준 일대기, 정주영이 가장 사랑한 아들, 생모는 누구?

정주영 회장은 ‘왕회장’ 답게 자식 욕심 또한 대단해 무려 8남 1녀를 두었습니다. 그중 가장 애정을 가졌던 아들은 여섯째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이었습니다. 정몽준 또한 극진한 효자로 아

okgoodwriter.com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된 정주영 며느리

정주영의 다섯째 며느리이자 가정주부였던 현정은은 남편 정몽헌 회장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현대 회장에 취임하면서 인생역전을 겪었습니다. 현대가 유일한 여성 회장으로 험난한 가시밭길

okgoodwriter.com

 

반응형

TOP

Designed by 티스토리